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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사 완전정리: 918년 건국부터 1392년 멸망까지 474년 왕조의 모든 것

해인사 팔만대장경

 

고려왕조란 무엇인가? 한반도 중세시대의 찬란한 문화유산

고려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복합적인 문화를 꽃피운 시대로, 918년 태조 왕건의 건국부터 1392년 조선 건국까지 무려 474년간 지속된 중세 봉건왕조입니다. 고려는 단순한 정치적 통치체가 아닌, 불교문화와 유교정치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독특한 문명체계를 구축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아는 '코리아(Korea)'라는 국호의 어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문화적 개방성과 정치적 자주성의 절묘한 균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중국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강대국들과의 복잡한 외교관계 속에서도 독자적인 문화정체성을 유지했으며, 특히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등 세계사적 수준의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고려 건국배경과 태조 왕건의 통일전쟁 (918-936년)

 

후삼국시대 혼란과 왕건의 등장

고려 건국의 역사적 배경은 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지방 호족세력의 대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9세기 후반 신라왕조가 쇠퇴하면서 견훤의 후백제(892년), 궁예의 후고구려(901년)가 차례로 건국되어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송악(현재의 개성)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자 해상무역업자였던 **왕건(877-943)**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왕건은 처음에는 궁예의 후고구려에서 장군으로 활약했으나, 궁예의 폭정과 미륵불 사상에 기반한 전제정치에 반발하여 918년 정변을 일으켜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통일전쟁의 전개과정과 전략

왕건의 통일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정복이 아닌 정치적 통합과 문화적 포용을 동반한 체계적 통일이었습니다. 그의 통일전략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입니다:

군사적 측면: 왕건은 뛰어난 기병전술과 수군력을 바탕으로 후백제와의 결정적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특히 927년 공산전투에서의 패배를 딛고 935년 신검(견훤의 아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외교적 측면: 신라 경순왕과의 평화적 선양(935년)은 왕건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보여주며, 이는 무력통일이 아닌 합의통일의 선례가 되었습니다.

포용정책: 왕건은 '정치훈요 10조'를 통해 후삼국 구 지배층에 대한 포용정책을 명시했으며, 이는 안정적인 국가기반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 전기 정치제도와 문벌귀족사회 (936-1170년)

 

성종대 정치개혁과 유교정치 도입

고려 초기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성종(재위 981-997) 대의 대대적인 정치개혁이었습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 송나라의 정치제도를 선별적으로 도입하면서도 고려만의 독특한 정치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중앙정치제도: 고려는 중서문하성, 상서성, 어사대의 3성 6부제를 기본으로 하되, 중추원(군사), 삼사(재정) 등을 별도로 설치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구현했습니다.

지방행정제도: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누고, 12목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외관을 배치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서북면과 동북면의 양계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특별관리되었습니다.

 

과거제도와 문벌귀족의 형성

고려 과거제도는 중국제도를 수용하되 고려적 특색을 가미한 독특한 관료선발시스템이었습니다. 과거는 제술과(문학), 명경과(유학경전), 잡과(기술직)로 구분되었으며, 이론적으로는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른 관료선발을 지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벌귀족제가 형성되어 최충, 이자겸, 김부식 등 소수 문벌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과거급제, 음서제도, 혼인관계 등을 통해 세습적 지배층을 구성했으며, 이는 후일 무신정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외교관계와 국제정세

고려 전기의 대외관계는 실리외교와 자주외교의 조화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고려는 중국 송나라와는 책봉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거란(요), 여진(금) 등 북방민족과는 때로는 전쟁, 때로는 외교로 대응했습니다.

고구려 계승의식: 고려는 국호에서부터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으며, 서희의 거란 담판(993년)에서 이를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균형외교: 송-요-금의 삼각관계 속에서 고려는 어느 한 세력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실익을 추구하는 현실주의 외교를 전개했습니다.

 

고려 무신정권시대: 군사정치의 시대 (1170-1270년)

 

무신정변의 원인과 전개과정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고려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변동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정변의 근본원인은 문벌귀족의 무신계층에 대한 차별과 멸시, 그리고 의종의 사치와 실정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무신정변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닌 사회계층 간의 권력이동을 의미했습니다. 문신 중심의 문치주의에서 무신 중심의 무단정치로의 전환은 고려 정치사의 큰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최씨무신정권의 성립과 운영

무신정권 중에서도 가장 오래 지속되고 체계적이었던 것은 **최충헌으로 시작된 최씨 무신정권(1196-1270)**이었습니다. 최충헌과 그의 후계자들(최우, 최항, 최의)은 약 74년간 정권을 유지하면서 독특한 정치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정치기구: 최씨정권은 교정도감, 정방, 서방 등의 사적 기구를 통해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이는 왕실과 기존 관료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권력구조였습니다.

사회정책: 무신정권은 문벌귀족에 대한 견제와 함께 하층민에 대한 회유정책도 병행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사회모순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민란의 시대와 사회변동

무신정권기는 농민봉기와 노예반란이 빈발한 시대였습니다. 1176년 조위총의 서북면 민란을 시작으로, 김사미·효심의 난(1193-1194), 만적의 난(1198) 등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특히 만적의 난은 노예신분 출신인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며 신분제 타파를 주장한 최초의 평등사상 운동으로 평가됩니다.

 

고려 몽골침입과 강화도 천도 (1231-1270년)

 

몽골 7차 침입의 전개과정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원나라)의 고려 침입은 고려사상 최대의 국난이었습니다. 몽골군은 1231년, 1232년, 1235년, 1247년, 1253년, 1254년, 1270년 등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몽골침입의 직접적 원인은 1225년 몽골사신 저고여의 피살사건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몽골제국의 동아시아 정복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강화도 천도와 항몽투쟁

고려 조정은 1232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약 39년간 항몽투쟁을 지속했습니다. 강화도 천도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전략적 의미: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는 기병 중심의 몽골군에게 천연의 요새였습니다.

상징적 의미: 수도 이전은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문화적 의미: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조판사업이 이루어져 불교문화의 정수를 보존했습니다.

 

팔만대장경과 몽골침입기 문화

몽골침입이라는 국난 속에서도 고려는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 조판사업을 완성했습니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된 이 대장경은 총 81,258장의 목판에 새겨진 세계 최고 수준의 불교경전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단순한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몽골침입에 맞선 정신적 저항의 상징이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고려 후기 원간섭기와 신진사대부의 등장 (1270-1392년)

 

원간섭기의 정치적 특징

1270년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시작된 **원간섭기(1270-1356)**는 고려사에서 가장 복잡한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 시기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 정치적 자주성을 상당부분 상실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개방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변화: 고려 왕실은 원나라 황실과 통혼관계를 맺었으며, 고려왕은 원나라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았습니다. 또한 정동행성이라는 원나라 지방행정기구가 고려에 설치되어 내정간섭이 이루어졌습니다.

사회문화적 변화: 몽골풍(호복, 변발 등)이 유행했으며, 라마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또한 목화, 화약, 인쇄술 등 새로운 기술과 물품이 도입되었습니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개혁

**공민왕(재위 1351-1374)**은 원나라가 쇠퇴하자 적극적인 반원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의 개혁정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개혁: 정동행성 폐지, 변발 금지, 몽골식 관제 폐지 등을 통해 자주성 회복을 도모했습니다.

토지개혁: 권문세족의 불법적 토지겸병을 견제하고 국가재정을 확충하려 했습니다.

군사개혁: 쌍성총관부 공격(1356년)을 통해 영토를 회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성리학 도입

14세기 후반, 고려사회에는 신진사대부라 불리는 새로운 지식인 계층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기존 권문세족의 불교적 귀족문화에 대항했습니다.

대표인물: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대부분 중소지주 출신이었습니다.

개혁이념: 성리학적 이상사회 건설, 토지제도 개혁, 관료제 정비, 민생안정 등을 주장했습니다.

분화과정: 후에 온건파(정몽주 등)와 급진파(정도전 등)로 분화되어 조선 건국을 둘러싸고 대립했습니다.

 

고려 말기 정치적 혼란과 멸망

고려 말기는 왜구의 침입, 홍건적의 난,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립 등으로 극도로 혼란했습니다. 특히 우왕과 창왕 때의 정치적 혼란은 왕조의 정통성 자체를 흔들었습니다.

이성계의 등장: 무장 이성계는 왜구 토벌과 요동정벌 논의 과정에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했습니다.

위화도 회군(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고려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4년간의 정치적 격변을 거쳐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고려시대 문화유산과 예술

 

고려청자: 세계 최고의 도자기 예술

고려청자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특히 12세기 인종·명종 시대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고려청자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술적 특징: 순청자, 상감청자, 철화청자 등 다양한 기법이 발달했으며, 특히 상감기법은 고려만의 독창적 기술이었습니다.

예술적 가치: 중국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비색"이라 하여 감탄했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현재적 의의: 현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고려청자는 한국 도자기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불교문화와 건축예술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한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찬란한 불교문화가 발달했습니다.

불교 사상: 의천의 천태종 창시, 지눌의 조계종 중흥 등을 통해 한국적 불교사상이 정립되었습니다.

불교 건축: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등 목조건축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건립되었습니다.

불교 조각: 석굴암과 함께 한국 불교조각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제작되었습니다.

 

금속활자와 인쇄문화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국가입니다. 1234년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이 세계 최초의 기록입니다.

기술적 의의: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앞선 금속활자 발명은 세계 인쇄사의 혁명이었습니다.

문화적 의의: 서적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역사적 의의: 이 기술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한글 보급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시대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계승

고려시대 474년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닌 한국사의 중핵을 이루는 찬란한 문화유산입니다. 고려가 남긴 정치제도, 문화예술, 사상철학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 한국사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유산: 중앙집권제, 관료제, 과거제도 등은 조선왕조로 계승되어 한국적 정치전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문화적 유산: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등은 현재까지도 한국문화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사상적 유산: 불교문화와 유교정치의 조화, 개방적이면서도 주체적인 문화수용 등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고려시대는 개방과 포용, 창조와 계승이 조화를 이룬 시대였으며, 이러한 정신은 21세기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이기도 합니다. 고려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문화강국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으며, 이는 현재와 미래의 한국사회 발전에도 소중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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